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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문화관광

독립운동가 백초월

작성일 2017.02.24

작성자 문화체육과

조회수 1298

독립운동가 백초월 인물 이미지
백초월(1878~1944, 속명 인영) 스님은 1878년 2월,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금산마을)에서 태어나 14세에 함양군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여 한국근대사의 대표적인 승려이자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을 이뤄 진정한 보살의 행보를 가신 큰스님이다.

초월스님은 당시 최고의 강백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여 불교 사상에 근거한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결사 단체를 만들어 적국 각처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등 청주교도소에서 순국·입적하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16년 무렵 영원사 주지로 재직하였으며 그의 학문, 경학에 대한 실력도 상당하여 1915년에 개교한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도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후 법주사 청주포교당인 용화사의 포교사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상경하여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중앙학림에 두고 중앙학림 학인들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면서「혁신공보」라는 비밀신문을 발간하여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상해에서 제작된(1919.11) 승려독립 선언서 배포와 의용승군 조직의 주도자로 지목되었다. 백초월은 상해 임정의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학인들을 사찰로 보내 군자금을 모금했다.


또한, 일본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몇차례 옥고를 치렀다. 그럴 때면 그는 반미치광이 흉내를 내기도 했으며, 간혹 일제의 모진 고문에 정신이상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백초월은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피체되어 1939년 10월 23일에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43년 3월 3일 출옥한 후에는 신촌의 봉원사로 주거가 제한 당하였다. 1943년 겨울 식민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 중국행 화물열차에‘대한독립만세’낙서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받은 모진 고문으로 1944년 6월 29일 옥중 순국(승랍 55세, 세수 69세)하였다.


정부에서는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는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이후 백초월 스님의 재조명 작업이 계속되어 1991년에 고향인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 ‘구국당 인영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가 건립되었다.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에 소재한 진관사 칠성전 해체공사 과정에서 백초월 스님의 유품인 ‘일장기 위에 그린 태극기’와 함께 독립신문 등 자료 20여점이 90년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2010년 KBS 역사스페셜‘백초월의 독립운동’이 방영되었고, 2014년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6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우리군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2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독립운동 당시 사용되었던 일장기 위에 그린 ‘진관사 태극기’를 고성읍 주요도로변에 게양하여 백초월 스님을 비롯한 우리지역 독립유공자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8·15광복절에도 우리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진관사 태극기’를 계속해서 게양할 계획이다. 또한, 고성박물관에서는 2월 28일부터 3월 19일까지 20일간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 특별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등록문화재 458호)>

<진관사 태극기(등록문화재 458호)>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영오면)>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영오면)>

<진관사 태극기 게양(고성읍 도로변)>

<진관사 태극기 게양(고성읍 도로변)>

<참고자료>

「백초월」 독립운동가 초월스님의 불꽃같은 삶(김광식 지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룩(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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