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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명 진형재 행장
(陳亨載 行狀)
시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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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고성군 상리면 오산리 출신으로 형재(亨載)공의 자는 사흥(士興) 본관은 여양(驪陽)이며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극경(克敬) 백곡(백谷)선생의 7대 손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체결되고 이와같은 국내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재등용으로 몇차례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향리에 살면서 모든 예법으로 몸을 가다듬되 경(敬)과 의(義)를 으뜸으로 삼으면서 선조의 가훈을 지키는 사람만이 후손이라고 가문에 가르치고, 호구단자(戶口單子) 제도에 따라 거주지, 직업, 성명, 연갑(年甲), 본관, 사조(四祖), 처(妻) 및 처의 연갑(年甲) 등을 평성감영 한성부에 보고하고 상계하여 검인받아 여양진씨(驪陽陳氏)의 가통을 보존하였다.

이 호구단자(戶口單子) 제도는 공부(貢賦)와 국역(國役) 등과 직접 관계가 있음으로 향리는 이를 기화로 서민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증감을 자유로이 하는 부정으로 관호(官戶) 은호(隱戶)라는 폐단이 생겨서 국력신장에 지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공은 이와 같이 옳지 못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을 창안하여 거주지를 원적(原籍)으로 하고 각호에는 호패를 달게하는 제도를 한성부에 상계하여 정부에서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 호적은 해마다 수정되었고 국가의 재정면에 공헌한 공적을 남기게 되었으며, 그후 호구조사규칙급(戶口調査規則及) 세칙(1896년)을 법제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의 그 명성은 전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고종12년(1875년)에 정삼품(正三品)의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봉해졌고, 그해 9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의 벼슬도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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