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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문화관광

임진왜란체험기
  • 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 문의전화 055-670-2801

소개

01 당항포관광지
당항포 관광지는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의 당항만에 위치한 임진란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당항포해전 대첩지로서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전멸시킨 곳이다.

이충무공의 멸사봉공의 혼이 깃든 당항포대첩지를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군민들이 뜻을 모아 1981년 성금으로 대첩지를 조성하고 1984년 관광지로 지정되어 개발 후 1987년 11월에 개장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충무공이 두 차례 출전하여 왜군을 전멸시킨 호국 성역지로서 기념사당(숭충사), 당항포해전관, 전승기념답, 거북선체험관, 동물류의 박제, 공룡알 어패류의 화석 등을 전시한 자연사관, 야생화와 어우러진 자연조각공원 및 수석관으로 구성된 자연예술원이 있다.
그리고 1억년전 물결자국, 공룡발자국화석 등 호수와 같은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경관, 청소년모험놀이장, 레져를 겸한 체육시설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호국정신 함양과 자연교육 및 가족, 단체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관광지이다.

※당항포대첩 이야기

1592년 6월 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이 지휘하는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에, 조선 수군 선단은 당항포 포구까지 이십여 리의 긴 해협을 따라 일렬 종대로 진입하였다.

당항포 포구에는 일본군의 대형 전함 9척, 중형 전함 4척, 소형 전함 13척이 정박 중이었고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선단이 포구로 접근하자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수군 선단이 철수하는 척 하자,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일본군 선단이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 선단의 대다수는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이 포구 안으로 도피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하여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은 이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26척과 승선 병력 전원을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02 운흥사
고성군 하이면 와룡산 향로봉(香爐峯)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운흥사(雲興寺)는 1,300여년전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조사가 창건한 신라고찰로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 50여 말사 중 산세와 규모가 비교적 큰 수 말사에 속하고, 임진왜란때 승병의 본거지로서 사명대사의 지휘아래 6,000여 명의 승병이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 논의차 세 번이나 이 곳을 왕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시대의 불화 중 가장 많은 걸작품을 남기고 있는 『의겸(義謙)』 등이 나왔다.
그 당시 절의 규모는 현존하는 산내 암자인 천진암과 낙서암을 비롯하여 아홉군데의 암자가 있었고 곳곳에 남아있는 절터와 대형 멧돌 그리고 전방 1km 떨어진 언덕에 고승들의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임진왜란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효종 2년(165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대웅전과 영산정, 요사채와 그 사이의 장독대가 전부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범종루(梵鍾樓),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이 중 대웅전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내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1호인 괘불(掛佛)과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4호인 경판(經板) 등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상과 더불어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감로탱`인데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불화를 잘 그리기로 이름난 의겸이 그린것으로 보아지며 당시 일반인들의 생활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화를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명부전 목조각상, 목제원패, 경판 등 30여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가장 많은 승군이 죽은 날로 기록되는 음력 2월 8일이면 국난극복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가 숨진 호국영령들을 위한 영산제가 열린다.

운흥사에서 와룡산 정상 쪽으로 300m쯤 오르면 운흥사의 부속암자인 천진암(天眞庵)에 이르고 여기서 200m쯤 오르면 낙서암(樂西庵)에 이르게 되는데, 낙서도인이 수도하였다는 낙서암은 물이 세다고 하고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03 소천정
소천정은 조선 중기 장군인 의숙공 최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공이 어릴 때 무술을 연마하고 출생지인 이곳 구만면 효락리에 1872년 최씨의 후손들이 건립하여 공을 배향하는 정자이다.

최강은 선조 18년(1585년)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성, 진해 사이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화공법을 써서 왜적의 선박을 불지르고 전공을 세웠다.
도총전력에서 가리포(전남 완도) 검사로 임명되었고, 그후 경상도 좌수사 광해군때 충청수사를 역임했고, 사후(死後)에는 병조판서에 추종되었다.

소천정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평면의 형식과 구조로 보아 자연의 경관을 감상하고 인격을 닦는 일반적인 정자의 형식에서 벗어나 공부하고 집회를 갖는 재실의 성격을 뛰고 있다. 기단정면에 기존 기단과 나란히 둥근 초석이 4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건물은 현재보다 조금앞에 정면 3칸의 평면을 가진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가리포(전남 완도) 검사, 포전실록 1매, 선무원 중공신록 훈교지 1매, 의숙공 시호교지 1매, 증지교지 1매, 의숙공 실록 목판 45매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04 호암사
이 사당은 중국 노나라 영양인 기사무장 천만리공(千萬里公)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천만리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 장군 휘하의 조병영량사 겸 총독장으로 아들 상,위와 함께 출정하여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에도 참가하여 왜적을 섬멸한 공훈이 혁혁하여 조정에서 화산군으로 봉하고 불도사를 건립하여 공의 신위를 봉안 제향토록 하였으며, 고종때 다시 칙령으로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추서하였다.

공은 왜란이 끝난후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사조가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3량구조 맛배지붕인 호암사가 경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동일 축선상에 내삼문, 강당, 외삼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내외삼문은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이고, 외삼문은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공의 시호장과 유사를 엮은 목판 68매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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