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성군 문화관광

시조시인 서벌

작성일 2017.04.07

작성자 문화체육과

조회수 1000

시조시인 서벌 인물 이미지
서벌(徐伐, 본명 봉섭, 1939∼2005) 선생은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 838번지, 일명 바루절이라 불리는 산골짝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부친 서부관徐富寬과 어머니 김복수-福壽의 3남 2녀 중에서 맏이이자 장손으로 태어나 다섯 살 무렵에는 아랫동네‘새띠이’마을로 이사를 했다.

1945년 광복하던 해, 외가가 있는 고성읍 수남동의 남포 갯가로 이사를 가서도 그를 따라온 것은 역시 가난이었다. 해방이 됐지만 산들이 벌거벗고 있는 탓에 그는 산을 몇 개씩이나 넘어 다니면서 땔감을 구해야 했고 소 먹이는 일, 들에서 농사짓고 풀베기 하던 일, 그가 직접 들려준 그의 소년기는 고난과 인고의 기록이다. 생활의 터전이나 학력으로 남들보다 모자라다 싶은, 그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이력서는 그에게는 되려 엄청난 약방문이 되었다.」고 김열규교수는〈서벌 시조론〉에서 서술했다. 가난이 위대한 시인을, 위대한 문학인을 잉태한다는 말은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유효한 말인 것 같다. 서벌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시인의 길로 들어섰을지는 의문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로 학교교육을 끝내야 했고, 허리 굽으신 할머니와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와 어린 동생 셋을 돌봐야 했다. 두부장수 어머니는 가장, 나는 주부역할, 그렇게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식구가 모두 굶주리는 것 헐벗다시피 사는 정황이었다. 나의 문학은 바로 여기로부터 비롯된 몸부림의 숨소리들이었다.」고 그는 술회를 했다. (서벌〈구차한 보고서〉《조선문학》)

서벌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중퇴해 실의에 빠져 있던 그 즈음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책 한 권이 다가온다. 이호우의 시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습작한 시를 박남수 시인에게 보여 가능성을 인정받고 17∼18세 때 김춘랑을 위시하여 이문형, 선정주, 최진기, 최우림, 남정민 등 고성문학의 태동의 하나였던《영번지》동인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시동인지《갈매기》,《이향異鄕문학회》,《향토문학》,《기수문학》, 《율律》 등을 통해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한다. 그의 나이 22세 때인 1960년에 4·19가 일어나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타고난 성품 그대로 고성의 데모군중에 앞장을 서서 격렬하게 투쟁을 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당시 그의 활동이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확실한 민주화운동이었음에도 아무런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1961년 그의 나이 23세 때 그동안 틈틈이 써둔 시를 모아 발간한 첫 시집 《하늘색 일요일》이 세상에 나온다. 시집의 발문은 당시 시조계의 거목이던 이태극 씨가 써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서벌은 한국시조계의 문을 힘차게 열고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여 1972년 《각목집(角木集)》을 발간했으며, 중앙일보 시조대상(1992년), 남명문학상 본상(1993년), 가람시조문학상(2003년) 등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5년 8월 건강악화로 66세의 나이로 작고 한 후 그의 생애와 문학활동, 작품세계가 재조명되고 있으며, 고성문학사에 서벌선생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성문학의 태동기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고성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현재, 서벌선생이 고성읍으로 이사 후 생활하였던 고성읍 수남리(현, 고성군보건소 밑) 주택은 하전정비 및 도로확장 등으로 인해 편입 철거되고 일부는 공터로 남아있다. 고성군에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서벌 선생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영현면을 떠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활했던 고성읍 수남리 일원에 시비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고성읍으로 이사 후 거주하였던 수남리(현, 고성군보건소 주변) 터>

<고성읍으로 이사 후 거주하였던 수남리(현, 고성군보건소 주변) 터>

<참고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