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성군 문화관광

독립운동가 최낙종

작성일 2017.08.04

작성자 문화체육과

조회수 1132

독립운동가 최낙종 인물 이미지
최낙종(崔洛種, 1891∼1945) 선생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서 태어나 고성지역 최초 독립운동인 구만·배둔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를 규합하여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한학을 공부하던 학자였다. 선생은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고성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접면인 회화면(會華面)까지 사전연락을 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그 선두에 서서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배둔장터로 행진하였다.


배둔장터 만세운동을 끝내고 돌아 온 최낙종 선생과 동지들은 일본 정부의 녹을 먹고 사는 조선인 관리들에게 퇴직하라는 내용을 담은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1919년 3월 21일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동권고문을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일제가 3·1운동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체포하려 하자 선생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함경도로 가서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5년 5월 22일에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40원의 언도를 받았으며, 1926년 11월 30일 소위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을 동경구(東京區)재판소에서 언도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세달 남기고 병으로 출소 한 후 광복 두 달여를 앞두고 일본에서 1945년 6월 8일 작고하자 의열단원 박열을 비롯한 재일본 조선인들의 추도문이 쇄도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낙종 선생의 후손(손자-최연도, 구만면 거주)은‘내 할아버지가 목숨을 버리고도 지키려 했던 내 나라입니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존심과 긍지 덕분’이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최낙종 선생 공적비>

<독립운동가 최낙종 선생 공적비>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나팔소리가 처음 울린 최씨문중 선산>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나팔소리가 처음 울린 최씨문중 선산>

<최낙종 선생 생가, 당산길 67번지(당시 기와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

<최낙종 선생 생가, 당산길 67번지(당시 기와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독립운동가 최낙종)
고등경찰요사 16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65·26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77면
고성신문(2016. 3. 25) 기사 참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