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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문화관광

독립운동가 배만두

작성일 2017.06.02

작성자 문화체육과

조회수 1141

독립운동가 배만두 인물 이미지
배만두(裵萬斗, 1896∼1979) 선생은 고성 하일면에서 태어나 고성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14년 무렵부터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기독교청년회가 운영하는 야학에 다니며 학업을 계속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창덕궁수비대(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신식 군사훈련을 익혔다. 그러나 일제의 황실호위대 해산령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와 일제의 식민정책에 시달리고 있는 동포들을 보며 망국의 통한을 절감하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짐했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배만두선생은 고성읍 덕선리에서 철성의숙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던 박진완의 연락을 받고 이상은·김상욱과 함께 진주사람 이주현을 만나 고성에서 3차에 걸쳐 만세의거를 결행하기로 협의하였다. 3월 17일 제1차 거사일을 앞두고 밤새워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학생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분주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나 3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이 배만두선생의 가택을 수색하고 그를 체포하면서 제1차 의거는 결행되지는 못하였다. 구금되어 가혹한 고문과 조사를 받으면서도 의거에 대하여는 함구하였고 제2차 의거는 3월 22일 고성읍 장터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배만두선생은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있던 조선인의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떠나 통화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일찍이 황실수비대에서 훈련받은 경험을 토대로 신병훈련을 보조하였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군 이청천부대의 예하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을 피하여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흑하사변(자유시사변)이 발생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주로 돌아온 배만두선생은 독립군의 밀명으로 함경도지방에서 군자금모집과 독립군 초모공작(招募工作)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광복군을 이끌고 돌아온 이청천 장군의 부름을 받고 이범석 장군이 조직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서 일을 해달라는 간청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향리 고성에서 건국준비위원회(고성군부위원장), 한국독립당(고성군당위원장) 등에 관여하였고, 육영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다 3.1운동 60주년을 맞는 1979년 3월 1일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배만두 선생은 우리 고성지역의 독립운동가로 생전에“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독립유공자 공훈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후손(장남-배영, 고성읍 거주)도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선친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성초등학교에서 거행한 1973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배만두 선생>

<대성초등학교에서 거행한 1973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배만두 선생>

<참고자료>

부산경남 3.1운동사(1979. 9. 10, 사단법인 3.1동지회)
경남향토사 논총(2010. 12. 21, 경남향토사연구협의회)
고등경찰요사(1934. 경상북도 경찰부)
배만두선생 장남 배영(裵營) 인터뷰 녹취 발췌(2017.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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