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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문화관광

독립운동가 허재기

작성일 2017.07.11

작성자 문화체육과

조회수 761

독립운동가 허재기 인물 이미지
독립운동가 허재기(許在基, 1887∼1969) 선생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에서 태어났으며, 3.1만세운동 주도와 독립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 3월 20일 회화면 배둔리(會華面 背屯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허재기 선생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구만면(九萬面)의 청년 유지인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僖)·최정원(崔正元)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한문학자 이종홍(-鍾弘)에게 독립선언서를 요약해 줄 것을 부탁해서 그것을 두 아들과 함께 필사하여 밤을 이용해 12개 동리에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개천면(介川面)·마암면(馬岩面) 주민들이 구만면(九萬面) 국천(菊川) 모래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 허재기선생이 등단하여 1)공약삼장(公約三章)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시위대열은 마침 장날인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는 완전무장으로 도중을 차단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대열이 이들에게 접근하자 헌병대가 말을 타고 시위대열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은 나팔을 불어대며 저지선을 뚫고 배둔리 장터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터에서는 전날의 연락으로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였다.


이에, 선생은 8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일제는 그들 재향군인의 협력까지 받으며 시위를 진압하기에 안간힘을 썼으나, 시위대열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구만면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구만면으로 돌아온 즉시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기초하여 이를 구만면사무소 이재홍(-在洪)에게 등사하도록 하여 각 도와 군에 있는 관공서에 우송하였다. 1920년 11월 19일에는 상해 임시정부(上海-時政府)의 밀사인 곽정곤(郭正坤)과 함께 마암면 장산리(馬名面 章山里)의 허경택(許京澤)을 찾아가 군자금 10원을 모금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5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처벌의 건)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1운동 창의탑 보존위원회』에서는 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구만면 국천변에서 시작된 고성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인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2008년부터 매년 개최하여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현장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주1) 3.1운동의 공약삼장(公約三章)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독립운동가 허재기 선생 공적비(고성군 구만면 보천도예 옆)>

<독립운동가 허재기 선생 공적비(고성군 구만면 보천도예 옆)>

<독립운동가 허재기 선생 생가(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소재)>

<독립운동가 허재기 선생 생가(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소재)>

<참고자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독립운동사 사료집(국가보훈처)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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