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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국가상징

D247

전설

무기정 기생

  • 조선조 때의 일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사전에 밀사를 보냈다. 그 밀사는 조선의 해변지도를 작성하고, 육로로 침략할 수 있는 전략을 짜고, 정사와 민심을 탐지하라는 임무를 띠었다. 밀사가 우선 접근하기 쉬운 울산의 해변을 따라 지도를 작성하면서 동래 부산 낙동강 진해 마산을 탐색하고, 고성에 발을 딛게 되었다. 당항포의 해변으로 당동 통영만을 둘러 고성읍 수남동 해변을 따라 삼천포로 가려고 하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잠자리를 찾아 주막집이 많은 무학동 무기정 꼽추집에서 하룻밤을 투숙하게 되었다. 꼽추집에는 사교성이 능하고 재치가 있으며 용모가 아름다운 기녀 몇몇이 있었다. 밀사는 몇 달간에 홀몸으로 임무수행에만 골몰하던 나머지 이국여자들의 상냥한 말과 행동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며칠을 묵은 밀사는 자기의 임무가 중함을 알고 돌아올 때 찾아 오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밀사가 무학동 무기정 꼽추네 집을 다시 찾아 갔을 때는 해가 바뀐 늦 가을이었다. 밀사가 집을 들어서자 기녀들은 지난 해 왔던 사람인 줄 알고 마음의 회포를 풀어볼 생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마쯤 취했을까? 시간이 흘러 사경이 될 무렵 밀사는 술에 취하여 한 기생의 품에 녹아 떨어졌다. 기생이 보니 밀사의 품속에 보퉁이 하나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기생은 완전히 잠든 밀사의 가슴을 뒤져 무명 비단보에 다섯겹 여섯겹으로 싼 보자기를 열어보았다. 보자기 속에는 장래 우리 나라를 침략할 전략과 해로의 공격요지며, 육로로 도망할 수 있는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비록 내 몸이 기생의 몸이지만 내가 태어난 조국이요, 부모의 얼이 뭍혀있는 곳이 아닌가?" 기생이 이렇게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밀사가 그림 그리던 붓을 찾아 조심스럽게 수남동과 마암면 소소강을 연결하여 통영군과 동해면 거류면을 섬으로 만들어 놓았다. 붓을 놓자 밀사가 몸을 움직이며 잠꼬대로 지껄였다. "일년 후면 내가 이 고을의 군주가 될 것이다." 기생은 혼비백산하여 짐을 전과같이 꾸려 품에 넣어 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몇달이 지난 어느날 왜놈들이 부산성을 무너뜨리고 고성쪽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드디어 임진년 유월 초닷새 당항포 앞바다에는 큰 집채만한 이층으로 된 배 한 척과 크고 작은 배 삼십여 척이 소소강으로 오더니 소소포 앞에 이르러 통로가 없음을 알고서 서너번 원을 그리면서 북과 징을 울렸다. 동네사람들은 이제 꼼짝없이 당하나 보다 하고 뒷산으로 피난하기에 바빴다. 얼마쯤 지나 아자음포쪽에서 조그만 우리 아군 범선 한 척이 나타나자 왜선은 원을 그리며 맴돌다가 아군의 범선을 발견하고 쫓아가니 범선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 아자음포 쪽으로 달아났다. 왜선은 당항포 앞 바다에서 진을 치고 북과 징을 쳐 기세를 올리는데 아군 범선이 돌아간 아자음포 쪽에서 거북선을 앞세운 범선 십오륙척이 왜군의 진영을 향하여 비호같이 들어가 순식간에 당항포 해전이 벌어졌다. 왜선은 소낙비에 찢어진 파초잎처럼 산산조각이 났고, 겨우 목숨만 건져 살아남은 왜적들은 뭍으로 기어올라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왜적이 일본밀사가 그린 지도에만 의존하여 우리 고장을 침범하려고 좁은 해로를 따라 소소포에 이르렀으나 해로가 막혔으므로 소소포 앞에서 원을 그리며 북과 징을 울리다 적의 동정을 살피는 아군의 범선을 발견하고 소소포보다 넓은 당항포로 내려와 진을 치고 기세를 울리다 바다의 명장 이순신 장군에 의해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명장 이순신 장군의 전공이라고 하지만 무기정 꼽추집 기생이 일본 밀사의 지도에 거짓으로 그려넣지 않았다면 우리 고장은 왜놈의 손에 아비규환이 되었을 것이다. 무기정 기생은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기녀의 몸이라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무학동 무기정이 옛날의 기생촌이었다는 전설이 있고, 이 후 당항포 앞바다를 왜놈들이 속았다고 하여 일명 속싯개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대섬(竹島)

  • 대섬은 고성군청에서 서남쪽으로 1㎞지점에 위치한 돌섬으로 현재는 육지화 되어 고성읍 수남리79번지로 주택이 일부 들어서 있으나 조선말기까지만 하여도 바닷물에 둘러 쌓인 섬이였으며 대나무숲과 아름드리 포구나무등 잡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려 갈가마귀 떼가 몇백마리씩 날아와 서식하던 곳이기도 하고. 섬지방 고깃배들의 긴급 피난지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中郞將)이던 호은. 허기가 신돈의 부정을 공박하는데 가담했다가 유배(流配)와서 더욱더 알려지게 되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호은선생을 다시 중용하려 하였으나 선생은 거절하고 이곳 대섬에 남았다.

    호은선생은 김해허씨의 고성지방 중시조 이시며 이후 후손들이 집터에 비를 세워 지금도 후덕을 기리고 있는데 선생의 한 많은 일생을 알리기라도 하듯 밤이면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나고 그때마다 비가 왔다고 한다. 대섬에 관한 전설 외에도 옥골에 쌓인 원혼. 희한한 돌탑. 용왕덤벙 등이 있다

담당부서고성읍 총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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