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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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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리(三德里)

삼덕리는 본래 고성군 회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신천(新川), 월계(月溪), 남진(藍津)을 병합하여 삼덕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월계, 남진, 신천, 치명(雉鳴)의 4개 마을이 있다.

월계(月溪)

  • 동명의 유래(由來)
    • 월계마을은 임란후에 밀성박씨(朴氏)와 진양정씨(鄭氏)가 살면서 남계(藍溪)라 칭하다가 1680년(숙종 6년)경에 진양정씨(鄭氏) 마을은 남진으로 분동하고 동명을 마을 원로들이 모여 지으면서 마을에 냉천산수가 동구(洞口)까지 흘러 들고 시내물에 비친 십오야(十五夜) 달빛이 너무도 아름다워 명월과 계수(溪水)의 시를 읊고 월계동(月溪洞)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544년(조선조 인종)경에 밀양박씨(朴氏)가 맨 먼저 밀양에서 이곳의 산자수명한 월계동에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은 밀양박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월계마을은 면 소재지(배둔)에서 약 3km 북쪽에 위치하여 동북쪽은 마산시 진전면과 접하고 서쪽은 냉천산(冷泉山)과 안령산(安寧山) 능선을 경계로 구만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로 마을앞의 삼덕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마을 윗쪽에 삼덕저수지가 있어 수원도 양호하여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 마을주민은 106가구에 388명(남자:194명, 여자:19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밀양박씨(朴氏)의 집성촌으로 김해김씨(金氏)와 철원윤씨(尹氏)가 각각 1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미·맥위주의 농업이 주업으로 한우를 호당 2∼3두씩 사육하고 있으며 일부 과수(밤, 감등)을 하는 농가도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는 1970년대에 스레트로 전면 지붕 개량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스라브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주택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기, 전화, TV 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등학교 교육은 마을내에 있는 삼덕초등학교(분교)에 취학을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교는 회화중학교와 고성고등학교 및 고성,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재실과 효행비
    • 원천재(原泉齋)
      마을 뒤에 있는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로 매년(음력) 10월 10일에 향사를 하고 있고 하계방향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경노효친에 대한 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 효행비(孝行碑)
      마을 앞 국도변에 있는 효행비로 남계밀성박공위치심(藍溪密城朴公諱致審)의 효행비이다.
  • 석담(石潭)
    • 마을앞 국도변에 있는 석담으로 1674∼1720년(조선조 숙종)경에 귀목아무를 심고 석축으로 조망대(眺望台)를 조성하고 또 지소(池沼)를 만들어 "석담"이라 이름하여 원근 노객(路客)들의 휴식처로 활용되어 오다가 일제시 국도가 조망대 앞을 관통하면서 지소는 없어지고 지금은 조망대에 귀목(수령 약300년 추정)만 남아있어 주민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지명 일화(逸話)
    • 담안샘(井)
      마을 입구에 있으며 주민 100여호에 400여명의 식수를 공급하는 단 하나의 샘으로 여름에는 어름같이 물이 차고 겨울에는 온수처럼 따뜻하여 담안(牆內) 샘으로 유명하다.
    • 산제터와 백일기도
      냉천산중의 여평(麗平)바위에 있는 산제터로 옛날부터 매년(음력) 정월 초1일 자(子)시에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산제를 지내 왔으나 약 30여년 전부터 동제로 전환하여 지금은 매년 정월보름날 일출시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한일합병 당시 밀성박씨 문중에 자식을 갖지 못한 부인이 백일생남기도를 하였는데 마지막날 꿈에 범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성품이 범과 같이 날카롭고 대범하여 후일 향장(鄕長)이 되어 동구밖에서 일본헌병 2명이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예의에 어긋난 처사라하여 대노하며 헌병을 엄히 꾸짖어 도망치게 하였다가 그 뒤에 일본헌병에 잡혀가서 많은 고문을 당하고는 분개하여 부자(한약재)를 들고 자결하였는데 그분이 밀성박씨 다포(茶浦) 기찬공(基燦公)이시다.

남진(藍津)

  • 동명의 유래(由來)
    • 진영정씨(鄭氏)의 남포공 곽(廓), 섬, 규(奎)의 삼충신(삼형제)이 임란때 왜적을 막아 지켜온 남진마을은 삼덕저수지를 막으면서 담수구역을 넓히기 위하여 마을 아래쪽에 저수지 뚝을 설치해야 한다는 계획이 있어 이렇게 되면 마을은 배를 타고 다녀야 하고 마을앞을 흐르는 남계는 나룻터가 된다하여 마을명을 남진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마을의 형성된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임란때 삼충신이 이곳에 침입한 왜적을 막아 마을을 지킨 바가 있어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그 이전으로 추정이 되며 현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성씨는 진양정씨(鄭氏)가 많고 그 외에 함안이씨(李氏), 청주한씨(韓氏), 김해허씨(許氏)등 제씨가 거주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남진마을은 면 소재지(배둔)에서 약 1.6km 동북쪽에 위치하고 국도 14호선에 인접한 마을로 북쪽의 적석산(積石山)과 동북쪽의 탑곡산(塔谷山)을 경계로 마산시 진전면과 경계를 하고 있고 "방말띠고개"의 국도 14호선의 고성터널을 통하여 마산 방면의 갑문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하다.
  • 주민(住民)
    • 마을 주민은 49가구에 169명(남자:85명, 여자:84명)이 거주하며 거주민의 성씨는 진양정씨(鄭氏), 함안이씨(李氏), 청주한씨(韓氏), 김해허씨(許氏), 밀양박씨(朴氏), 경주이씨(李氏)등 성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미·맥위주의 농업에 축산(한우 호당 2∼3두)과 양봉, 과수(밤, 감, 참다래 등) 등을 겸한 복합영농을 하고 있으며 옥수골은 관광농원 조성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에 스레트와 기와 등으로 전면 개량하였으며 주택구조도 지금은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하고 있고 현대식 스라브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다. 그리고 전기, 전화, TV 등 문화시설은 전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등학교는 삼덕초등학교(분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학교는 회화중학교에 그리고 고등학교는 고성고등학교와 고성,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삼충각(三忠閣)과 삼충신 축제
    • 마을내에 진양정씨(鄭氏) 남포공(藍圃公) 곽(廓), 섬, 규(奎)의 삼형제 정씨삼충(鄭氏三忠)의 사적비가 건립된 삼충각(정려)이 있으며 삼충신 축제가 매년(음력) 3월 19일에 지방의 유림들이 참석하여 행하여 지고 있어 공들의 충효사상을 흠모하고 있다.
  • 적석산(積石山)과 옥수골 온천개발
    • 구만면 주평리 번덕과 회화면 삼덕리 옥수골, 마산시 진전면과 경계를 하고 있는 적선산은 조선조때 이곳 회화면 삼덕리에 진양정씨와 밀양박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산의 형상이 특출하고 웅장하여 마치 바위를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적석산(積石山)이라 불리어 왔다고 전하고 있으며 이 산은 태고때 해일(海溢)로 산 9부능선의 돌과 바위에 굴껍질이 붙어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곳 적석산 중턱에 조선시대에 절이 있었는데(지금은 절터와 샘, 대나무숲만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절에 청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는데 말산등 암자에 안치해 두고 승려들이 불공을 드리고 재앙을 물리치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의 크기는 대인이 말을 타고 앉아도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을 절에 온 사람들이 말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돌려놓으면 말머리 방향30리 이내에 있는 개, 짐승이 호랑이 등 산짐승에 물려 갔고 원인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절 이 조선조 말엽에 소실되고 청동말도 분실되었는데 그후 이곳 유림들이 무쇠로 말을 만들어 그 곳에 안치해 두었으나 또 분실되고 1970년대에 이곳에 사는 박씨문중에서 30cm가량의 작은 규모로 말을 만들어 말산등 절벽 틈 사이에 안치하여 지금도 전하여 오고 있다.
      적석산 밑의 옥수골(玉水谷)은 산과 물, 바위, 골짝기가 어우러진 분지형태로 산은 옥산(玉山)이고, 물과 골짜기는 옥수골(玉水谷) 등으로 그 이름이 지칭되고 있으며, 이곳에 온천이 발견된 것은 옛날에 피부병에 고생하던 마을주민이 겨울에 산에 나무하러 갔다고 내려오면서 개울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옹달샘을 발견하여 그 물에 피부병 약수로 유명해지자 1980년대에 창녕 부곡옥천개발자 신현택씨가 온천개발에 착수하여 1990년 1월 15일 경남고시 제444호로 온천개발지구로 고시되어 현재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 남진약수탕 전설
    • 남진마을 동남편 금봉산 중턱에 있는 샘물로 이곳의 산세가 여인이 좌측 무릎을 올리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현상으로 약수탕은 여인의 음부위치에 있다고 하여 "암물"이라 부르고 있다.
      이 약수탕의 전설은 옛날 이곳에 나무하러온 총각이 약수탕에서 나온 어여쁜 처녀가 미묘로 끌어들이면 끌려가고 끌려가보면 사라지고 다시 돌아서면 또 끌어들이고 이렇게 해서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고, 또 나병환자가 약수탕 물을 먹고 목욕을 하고 나니 병이 나았다고 하여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7월 칠석날과 백중날이 되면 인근의 많은 주민이 몰려 들어 물을 맞고 가져 갔으며 옛날에는 마을에서 명절 때 약수탕에서 금봉산 산신제를 지냈다고 하며 근래에 와서 이 약수탕 물을 생수(生水)로 개발을 하겠다고 서두르고 있다.
  • 정씨동생화회문기(鄭氏同生和會文記)
    • 회화면 삼덕리 정종덕씨가 보존하고 있는 문기로 숭정(崇禎) 3년(경오) 3월 28일에 정곽(鄭廓) 공이 아들 개건(蓋乾), 개세(蓋世) 두형제에게 재산을 분배해준 문서로 전해지고 있으며 1979년 5월 2일자로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천(新川)

  • 동명의 유래(由來)
    • 신천마을은 약 400여년전인 1590년경에 성주도씨(都氏)가 경남 함양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남하하던 중 산수가 수려하고 농토가 비옥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금봉산을 뒤로하고 앞을 흐르는 하천사이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 하여 마을명을 신천으로 호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590년 경에 성주도씨(都氏)가 경남 함양에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성주도씨(都氏)의 집성촌으로 지금은 도씨(都氏)외에 전주이씨(李氏), 경주정씨(鄭氏) 등 제씨가 거주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신천마을은 면 소재지(배둔)에서 약 2km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의 금봉산(金鳳山 해발 306.9m)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마을뒤로 에워싸고 있고 마을 앞을 배둔천이 흐르고 있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마을 앞의 평야지대는 경지 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며, 국도 14호선이 마을앞을 지나고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 주민(住民)
    • 마을 주민은 45가구에 147명(남자:73명, 여자:7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성주도씨(都氏), 전주이씨(李氏), 경주정씨(鄭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여 축산과 과수(밤, 감 등)를 겸하는 복합영농으로 농가소득이 높은 복지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는 새마을 사업이 시작된 1970년대에 스레트와 기와 등으로 전면 개량하였으며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군내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여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한 가구도 있어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고 있으며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 등은 전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등학교는 삼덕초등학교(분교)에 그리고 중학교는 회화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고성고등학교와 고성,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재실(齋室)과 효행비(孝行碑)
    • 봉덕재(鳳德齋)
      도씨 문중의 재실로 마을내에 봉덕재가 있다.
    • 효행비(孝行碑)
      도씨 문중의 효행비가 마을내에 있다.
    • 송덕비(頌德碑)
      성주 도씨 득섭공(得燮公)의 송덕비가 마을내에 있다.

치명(雉鳴)

  • 동명의 유래(由來)
    • 치명마을은 약 400여년전 임란시에 피난민이 모여들었다 하여 지명을 둔지(屯地)라 불렀고 지금도 녹명(鹿鳴)을 넘나드는 고개를 둔지고개로 호칭하고 있다. 치명이란 마을명은 마을 뒷산 형국이 꿩이 나는 모양과 같다 하여 치명으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200여년 전에 재령이씨(李氏)가 함안으로 부터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그 뒤에 정씨(鄭氏), 박씨(朴氏), 배씨(裵氏), 조씨(曺氏), 이씨(李氏)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은 위 성씨 외에 최씨(崔氏), 김씨(金氏), 허씨(許氏)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치명마을은 면 소재지(배둔)에서 약 2km 북쪽에 위치하여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는 좁은 골짝마을로 옛날에는 비가 온 3일 뒤이면 물이 말라 드레물을 퍼야 영농을 할 정도로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가 어려웠던 지대였으나 지금은 지하수를 개발하여 물 걱정 없는 마을이 되었으며 마을 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 마을주민은 27가구에 72명(남자:38명, 여자:34명)이 거주하는 면내에서도 비교적 작은 마을로 거주민의 성씨는 진양정씨(鄭氏), 재령이씨(李氏), 달성배씨(裵氏), 밀양박씨(朴氏), 전주최씨(崔氏), 경주이씨(李氏), 김해김씨(金氏), 김해허씨(許氏)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여 축산과 고수(밤, 감 등)를 겸하는 복합영농 형태로 농가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는 1970년대의 스레트와 기와 등으로 전면 지붕 개량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한 가구도 있고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 등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등학교는 회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학교는 회화중학교에, 고등학교는 고성고등학교 및 고성,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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