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
외산리(外山里)
외산리는 본래 고성군 포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대천(大川)과 좌부천(佐夫川)을 병합하여 외산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대천과 좌부천의 2개 마을이 있다.
대천(大川)
- 동명의 유래(由來)
- 대천마을은 옛날에 큰 대나무 밭이 있었다하여 죽전(竹田)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때에 대천부락으로 개칭하여 바깥대내, 안대내, 돈막의 3개마을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대천마을은 약 400여년 전에 지금의 곡부공씨(孔氏), 강릉유씨(劉氏)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3개의 취락(바깥대내, 안대내, 돈막마을)으로 형성되어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마을의 지세는 동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약 3km 지점에 위치한 3개의 취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마을 뒤에는 절구산이 병풍처럼 펼쳐있으며 마을 앞은 당항만에 접한 해안마을로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마산시 진동면 시락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농경지는 산줄기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어 영농에 불편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 마을 주민은 73가구에 180명(남자:89명, 여자:9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강릉유씨(劉氏), 곡부공씨(孔氏), 밀양박씨(朴氏), 광산김씨(金氏), 창원정씨(丁氏) 등 여러성Trl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반농·반어촌 마을로 산록지에 형성된 농경지는 천수답이 많고 수원도 좋지못하여 영농에 지장이 많으며 수산업은 근해의 어선어업과 지선의 패조류를 생산하여 농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지붕은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마을진입로도 최근에 완전 포장도로로 개설되어 교통불편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고 가옥구조도 생활에 편리하도록 개량을 추진하고 있으며 각종 문화시설도 전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중등학교 교육은 면내의 동해초등학교와 동해중학교에서 받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고성과 마산, 통영 등지의 외지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전설(傳說)
- 절구산에 얽힌 전설
마을 뒤에 절구산은 산이 절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에 유씨(劉氏)성을 가진 힘센 장사가 살았는데 임진왜란때 왜군이 마을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유장사는 생각이 있어 마을 뒷산으로 달려가 보니 큰 절구에 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을 보고는 야간을 이용하여 마을주민을 모두 다른 곳으로 대피시킨후에 물이 고인 절구를 넘어뜨려 마을에서 잠자고 있던 왜군을 일시에 수장시켜 마을사람을 구하였다고 하여 그 후로부터 마을 뒷산을 절구산이라 부르게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절구산에 얽힌 전설
- 사적(事蹟) 및 기타
- 양촌리 성터(城址)
동해면 양촌리 산 176번지의 능선에 있는 약 700m의 석축성으로 축성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된 퇴뫼식 산성이다.성터에서 출토된 토기편(土器片)을 보아 주위에 있는 소가야시대의 내산리, 양촌리 고분군과 같은 시대에 축성된 성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성터는 고성의 동쪽 끝에 자리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반도의 입구부분에 위치하여 북쪽은 당항만, 동쪽은 진해만, 남쪽은 거제만에 접하는 남해안의 요충지대로 성의 표고는 113m의 9부능선에 토석으로 축조하였는데 흔적만 남아 있을뿐 외형상으로는 알아 볼 수 없고 지표상에 나타난 성의형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반월형에 약간 길게 축조되고 입구는 남쪽 계곡에 배치되어 있으며 성 안팎에 송림을 비롯한 잡목이 우거져 있고 부분적으로 잔디와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곳이 있다. - 양촌리 지석묘군(支石墓群)
양촌리에 남방식(南方式) 지석묘가 700m 거리에 8기가 분포되어 있다. 개석(蓋石)의 크기는 길이가 2.1m, 폭이 1.35m, 두께가 0.5m의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 마을 숲
마을 앞 하천변의 숲으로 약 200여년전에 김해김씨(金氏) 선조들이 서나무 30주, 포구나무 2주를 심어 이루어진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술으로 여름철 마을주민들의 휴식처로 잘 보존되어 있다.
- 양촌리 성터(城址)
- 명강재(明綱齋)
- 공부자(孔夫子) 영상(影像)을 모신 사우(祠宇)로 춘추(春 : 음력 2월 28일, 秋 : 음력 8월 27일)로 후손과 유림(儒林)에서 향사를 행하고 있다.
좌부천(佐夫川)
- 동명의 유래(由來)
- 덕곡마을은 구한말에는 지금의 덕곡과 법동마을을 합쳐 포도면의 "법법당"이라 불렀으며 또한 약 250여년전에는 번덕(넓은 잔디밭)과 장황곡(長黃谷)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번덕의 "덕(德)"와 장왕곡의 "곡(谷)"자를 따서 지금의 양촌리 덕곡(행정마을)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인근 내산리 지역에 소가야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고분군(古墳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옛적부터 사람이 산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또한 창원황씨(黃氏) 문중의 문헌에 의하면 약 450여년 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545년경부터 주민이 입촌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 좌부천마을은 마을 뒤로 노인산(老人山:해발 176m)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마을앞의 바다를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時洛里)와 접하고 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진해만, 서쪽은 당항만의 관문에 위치한 일촌 집단마을로 형성되어 육지 교통이 불편한 오지 마을이였으나 1970년대에 새마을사업이 전개되면서 전도마을 적포(赤浦)에서 마을까지 진입로를 개설하였으나 경사가 급하고 노폭이 좁아 교통이 불편하여 다시 1980년대에 대천마을에서 2.3km의 해안도로를 개설하여 지금은 군내버스가 다니고 있으며, 산록지와 해안 주변에 조성되어 잇는 농경지는 천수답이 많고 1985년도에 소류지(小溜池)를 신설하여 농업용수로 활용하고 있으나 한발시에는 한해를 입고 있는 지대이다.
- 주민(住民)
- 마을 주민은 1950년대 전후만 하더라도 80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55가구에 126명(남자:58명, 여자:6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광산김씨(金氏), 전주이씨(李氏), 곡부공씨(孔氏), 창원황씨(黃氏), 창녕성씨(成氏), 김해김씨(金氏), 밀양박씨(朴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 주민의 생업은 바다에 점한 농어촌마을로서 주업은 농업이나 어업을 겸하는 가구가 20여호나 되며 연안 공동어장에서 바지락 및 굴(石花)을 양식하여 연간 많은 어업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 마을의 초가는 1970년대의 새마을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현재는 현대식 양옥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주택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로 개량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기, 전화, TV 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 초·중등학교는 면내의 동해초등학교와 동해중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고성군내 및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당사나무(堂山木)와 동제(洞祭)
-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을 모신 당산에 약 200여년전에 천씨(千氏) 한분이 심었다고 전하는 당산나무는 귀목나무와 포구나무가 한 둥치가 되어 나무둘레가 약 7m나 되며, 이 당산나무에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마을에서 제관을 선정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 들돌의 유래와 좌대(座台)의 기문(記文)
- 당산나무 밑에 있는 이 들돌은 옛날 이 마을에 살던 한 장정이 풀짐속에 넣어 와서 당산나무 밑에 두고 마을 사람들이 힘겨루기를 하였다고 하며, 이 들돌과 같이 마을 주민이 단결하고 화합하는 상징으로 마을주민과 출향 인사가 힘을 합하여 1994년 5월 1일에 들돌에 좌대를 세워 아래와 같은 기문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들돌에 새긴 기문> 이 들돌(85kg)은 임진왜란때, 당항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이곳에서 힘자랑을 하며 어깨위로 들어 넘겼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들돌입니다. 그후 젊은이들이 이곳 동네 그늘아래에 모여 들돌을 들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청운의 꿈을 키웠습니다. 마을주민의 평안과 화목을 기원하고 젊은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서 옛선인들이 놀던 이곳에 좌대를 세워 그뜻을 오래 기리고자 합니다.서기 1994년 5월 1일 재부좌부천 친목회 일동
- 지명일화(逸話)
- 장군산(將軍山)
마을 앞산을 장군산이라 말하며 높이 약 170m 정도로 산이 갑옷을 입고 진해만을 바라보고 경계(警戒)를 하는 현상이라 하여 장군산이라 부르고 있다. - 노인산(老人山)
마을 뒷산을 말하며 높이 약 176m의 산으로 노인이 허리를 굽혀 작지를 짚고 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노인산이라 하고 있다. - 외일목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소포(小浦)마을과 진해만에 접하여 있는 해협(海峽)으로 임진왜란때 당항포해전에서 왜군이 패(敗)하여 도주하는 왜선을 이 지점에 예인(曳引)하여 완전 소멸한 곳이라 하여 "예인목" 또는 "예인끝"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외일목 또는 외일끝이라 부르고 있다. - 하동부사 진터(陳地)
외일목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위치한 경사도가 급한 험산(險山)으로 산 정상에 60평정도의 진지가 있는데 인력으로 구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임란때 아군의 경계 초소로 전해오고 있다. - 갓골 참샘이 물
갓(冠)을 쓰고 내려다 보는 형상이라하여 갓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여기서 나는 생수를 참샘이 물이라 하여 마을 상수도로 이용하고 있다. - 한나루 선창
나룻배(도선(渡船))로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소포마을로 왕래하던 도선장으로 지금은 선창터만 남아 있다
- 장군산(將軍山)